신자유주의 '악마의 맷돌' 시각화 한 공구작가


[서울 =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 = 공구 작가의 작업의 베이스는 21세기 신자유주의 경제의 위기에 직면하여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칼 폴라니의 저서 ‘거대한 전환’을 떠올리게 해준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폭주와 그로 인한 전 세계 경제의 혼란을 겪으면서 다시 주목받게 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비유를 빌려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에 비유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12월 9일까지 G컨템포러리에서 열리는 공구 개인전 제목도 ‘악마의 맷돌’이다.

이번 전시는 원형과 약탈에 관하여 연구해 온 공구 작가의 시각적 집대성체를 보여주는 자리다. 사진작가로 출발하여 확장시킨 10여 년간 다각적으로 연구해 온 작품 ‘원형 Archetype’과 시스템화된 거대한 ‘약탈’의 상징물로 완성한 BOX 시리즈를 국내서 처음으로 소개한다.

G컨템포러리 이은 아트디렉터는 “공구 작가의 작업의 출발점인 원형은 각 대륙, 각 민족, 각 국가에 분포한 에너지다. 이 에너지(정신적, 문화적)는 대부분 고갈되고 상위 포식자의 약탈로 대부분 사라졌다. 이 약탈프로그램은 더욱 진화하여 경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여 자본 약탈과 자본 계급의 진화로 이어졌고 1, 2차 세계대전이 지나간 동시대에는 더욱 첨예한 진화를 통해 전세계가 하나의 굴레에 사로잡힌 자본 약탈이 자행되고 있다고 작가는 피력한다. 합 원형과 약탈에 대한 작가의 수평/수직적 관점의 통찰적 결과물들을 디지털카메라와 그래픽 툴을 이용하여 시각화되고 무수한 BOX의 픽셀들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깨워냈다”고 전시를 소개했다.

Phantasmagoric

작가는 경제 연구전문가 ‘화이트독 WHITE DOG’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전시에서는 자본과 철학, 역사와 예술이 총체적인 하나의 메타포로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 지키는 원형의 힘’을 각성시키는 새로운 지점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원형의 힘은 폴라니의 실체적 ‘사회’와 연결된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이 인간 본성에 내재한 사회성 내지는 공동체성을 해체하고 파괴한다고 보았다. 산업혁명과 그 이후 성립한 시장자본주의는 사회를 맷돌처럼 통째로 갈아 인간을 원자로 만들어버렸다는 주장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주는 관계의 총체가 사회인데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사회'를 제거하고 모든 것을 경제와 시장에 복속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 내내 국가의 능동적 개입을 통해 완성되고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의 ‘유토피아’라고 못박았다. 자기조정 시장을 세운다는 것은 적어도 수천 년 수만 년의 인류사에 비추어보면 '자연적'이기는 커녕 극히 인위적인 유토피아적 망상이라는 것이다. 인간ㆍ자연ㆍ화폐를 상품으로 보고 '시장'에 맡겨둔다면, 결국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만 낳고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경제란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종교,사회 관계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밑에 버티고 있는 실체인 '사회'를 발견하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주장이다.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영혼은 분리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본연의 모습이다.

Beauty

공구 작가는 이번 전시가 2013년부터 시작된 원형과 약탈의 집대성된 결과물이라고 했다. 아직 이 약탈의 후반부는 끝나지 않았지만 방향성과 의도는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고 한다. 작가에 따르면 원형은 각 대륙, 각 민족, 각 국가에 분포한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정신적, 문화적)는 대부분 고갈되고 상위 포식자의 약탈로 대부분 사라졌다. 지구에 있는 많은 대중들은 고대 또는 그 이전부터 수많은 약탈을 받아왔다. 대륙의 수평적 약탈부터 수직적 인간 등급의 약탈이다. 이러한 약탈에는 과거에 전쟁과 계급제도가 주를 이뤘고 또 하나의 축은 종교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약탈 프로그램은 더욱 진화하여 경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여 ‘자본 약탈’과 ‘자본 계급’의 진화로 이어졌고 1,2차 세계대전이 지나간 동시대에는 더욱 첨예한 진화를 통해 전세계가 하나의 굴레에 사로잡힌 자본약탈이 자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4차산업혁명과 함께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등장하여 각 국가와 은행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한 탈 제도권 금융도 등장했다. 그러나 ‘탈중앙화의 탈脫’은 국가와 은행의 통제를 벗어난다는 의미이나 오히려 그들의 ‘거대한 하나의 중심’으로 몰아가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대중은 눈치채지 못한다. 이 장치는 모든 산업과 세계 금융의 일원화를 만드는 거대한 약탈시장의 도구인 것이다. 고대의 신화에, 중세의 종교에, 근대의 물신에, 현대의 금융신에 인간은 늘 그렇듯 포식자의 형태와 수법만 바뀔 뿐 숭배하고 빠져들 뿐이다. 스스로를 지키는 힘은 원형에 있다.

Offering Detail Cut(DC 047)

미술전문 출판인인 박덕흠씨는 공구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는 공구를 소개하는 책에서 작가의 작품들을 나름의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공구 작품 ‘Phantasmagoric’은 다 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최후의 만찬에 재미있게도 Phantasmagoric이란 제목을 붙여 놓았다.

칼 융이 언급한 기독교의 외향적 숭배의 위험성을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성화속에다 공구 자신의 의도를 끌고 들어 왔다.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는 작품속으로 발터 벤야민의 약탈 도구들을 가져와 가득 채워 놓았다. 작품 우측의 숫자는 비트코인의 총 발행 개수이다. 그 밑에서 마태오와 유다가 샴페인을 터트리며 비트코인의 개수를 좀 더 채굴하자며 시몬을 설득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세리 출신으로 금융업자들의 수호성인인 마태오와 은전 30개에 스승을 팔 아 치우는 배신의 아이콘 유다의 머리위에다 배치한 숫자는 나만 혼자 재미있게 느끼는 절묘한 배 치인가? 돈이 정의가 되고 약탈이 힘인 세상에 대한 패러디? 손오공이 제 아무리 날고 뛰어도 부처의 손 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듯이 비트코인은 예수의 손 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 물신(物神)들의 파티가 끝나고 나면 예외 없이 쌓이는 쓰레기(box)들, 그리고 쌓이고 펼쳐진 box들. 곳곳에 자동차 와 법륜, 크리스마스트리가 쳐박혀 있다. 황홀한 절정의 세계를 보여주는 4그루의 단풍나무들, 결국 쓰레기 더미에 떨어져 쓰레기가 되고 말 운명의 예언목이다. 주최자가 누구든지 파티는 계속되고 그 파티 끝에 남는 box는 생기고 버려지고 할 것이다. 공구는 자신의 작업에서의 box를 각질이라 했다. 각질은 항상 새로 생기고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는 각질의 반복처럼 약탈당하는 세상은 계속 그렇게 반복되며 흘러간다. 종교가 전부였던 중세란 최후의 만찬 식탁위로 권력과 힘이 생산하는 실체 없는 아우라(약탈 현장)들이 모두 펼쳐졌다. 그리고 시뮬라크르가 객관적 진리를 뒤엎는 세상이 창조되었다. 다 빈치의 원근법을 활용해 배치한 뒷배경들은 컨테이너다. 그런데 컨테이너의 바깥면이 안으로 들어와 배치되어 있다. 지금, 이 최후의 만찬장은 실내가 아니라는 소리다. 한정된 세상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들어와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종교로 자행된 중세의 약탈 현장 부터 현재 진행중인 코인 약탈까지, 약탈의 현장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Westin chosen Detail Cut(DC 053)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 운영부장도 거들었다. 공구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허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실체가 없는 신기루 같은 이미지들은 인간 신체의 피부에서 떨어져 나간 각질(종이박스)처럼 또 다른 유령과 같은 형상의 표피를 이룬다. 작가가 디지털 이미지 조각(박스 조각)을 하나씩 쌓아 올리거나 덧붙여서 오랜 시간에 걸쳐 거대한 이미지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미지-작은 데이터의 조각이거나 망점으로 형성된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것들-에 대응한다. 어쩌다가 우리는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허상에 쌓여 살게 되었을까?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파리의 번잡한 도로에서 다급하게 다가오는 마차를 피하려다가 진창에 빠져 흙탕물을 뒤집어쓴 상황을 ‘후광의 분실’이라는 시로 썼다. 보들레르가 말한 ‘후광의 분실’은 단순히 변화하는 도시 환경에 대한 불평이 아니다. 그의 투덜거림은 시인으로서의 주체 인식이다. 그는 도시의 변화와 기술 환경의 진보를 맞고 있는 세계에서 주체적인 감각하기와 경험하기가 더 이상 어려워졌음을 인지했다. 그가 본 세계에서의 사물(혹은 도시)과 복제된 상품은 도시의 진열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벤야민은 사물의 고유한 영혼이 사라지고 없는 복제된 사물들, 그리고 인간은 의식적 상호작용이 불가능해졌다고 보았다. 공구는 이것이 세상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즉, 마음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임을 말한다. 그는 “아우라는 사물이나 인간의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 그러므로 벤야민이 표현한 대로 대량 복제를 통한 아우라 제거는 불가능하고 각각의 내부에 존재하는 아우라의 원형을 추적해야 수평적, 비숭배적 예술 관계가 형성되는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고 말했다.